그의 연주를 들으면
'이제 아무 것도 필요 없어'라는 기분이 든다.
- 무라카미 하루키
이렇게 쓰인 정지화면으로부터 시작되는 ‘장고 인 멜로디’라는 영화를 봤다.
단 여덟 개의 손가락으로 자유를 연주한 재즈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타리스트 !
'장고 라인하르트'에 대한 첫 기록 영화이다.
장고 라인하르트는 벨기에 출생의 프랑스 재즈기타 연주자이다
집시 음악과 스윙 재즈를 융합시킨 집시 스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종종 "유럽 최초의 위대한 재즈 뮤지션"이라고 평가되며, 후세의 뮤지션에 큰 영향을 미치는 많은 걸작을 발표했다. 호텔 방에서 갑자기 사라져 집시의 야영지에서 묵는가 하면 몇 주일동안 번 돈을 하룻밤 도박으로 날려버리는 등 평생 ‘집시 기질’ 지닌 채 살아가며 연주했다.
벨기에 리벨시에서 태어난 장고는 12세 때 어머니에게서 선물 받은 벤조로 연주를 시작했고, 집시 무리를 떠나 파리의 음악인들과 교류하면서 음악의 폭을 넓혔다. 장고는 1928년 화재로 다리와 왼손에 심한 화상을 입게 된 후 왼손은 마비되고 두 개의 손가락을 잃었다. 이후 6개월에 걸친 혼신의 연습으로 재활훈련을 거쳐 핑거링을 할때 두 손가락을 질질 끌며 지판을 이동하는 특이한 연주기법으로 기타리스트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사진출처,굿인터내셔날
장고는 1930년 20살이 되던 해, 듀크 엘링턴, 조 베누티, 바이더백, 니콜스, 에디 랭, 루이 암스트롱 등의 연주에 감명을 받게 되면서 재즈 기타리스트의 길로 접어들었고, 1931년 프랑스 재즈계에 등장하여 1934년 파리에서 S.그라펠리와 함께 '핫클럽 5중주단(Quintette du Hot Club de France)'을 조직하고 독특한 기교와 광시곡 스타일의 기타 솔로로 미국에까지 알려졌다. 1946년에 듀크 엘링턴의 초대로 미국순회공연을 통해 자신의 기타세계를 널리 알렸다.
사진출처,다큐,장고 라인하르트의 후예들
왼쪽 손가락이 두 개 밖에 움직이지 않는 어려움 속에 장고가 펼쳐내는 재즈와 집시 사운드의 융합은 한 번 들으면 그대로 기억에 박히는 힘이 있다. 세상을 떠난 지 60년이훌쩍 넘은 지금가지 계속되고 있다.
또한 장고 라인하르트의 삶을 영화(장고 인 멜로디, 2017)로도 만들어졌으며, 그를 추모하는 노래가 만들어 질 정도로 재즈계에 최고의 뮤지션으로 회자된다.
그리고 이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장고 라인하르트를 추종하는 후예들이 장고 탄생 100주년(2010년)을 맞아 벌이는 기타 협연과 장고의 삶을 조명한 다큐멘타리 작품 ‘장고 라인하르트의 후예들’이라는 제목으로 제천 국제영화음악제에서도 선을 보였다. 한국의 한(恨)을 담은 선율과도 비슷한 어느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운 독창적인 주법들이 절묘하게 소개된다.
장고 라인하르트의 손자를 포함한 100명의 후예들이 전 세계를 다니면서 연주를 한다.
출처,영화'장고 인 멜로디'
영화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장교 파티에 앞서 함머슈타인 중위가 지시를 하는 장면이다. 식사 중엔 피아노 연주만 한다, 화성 장음계는 좋지만 블루스는 안 됨, 당김 음은 5% 미만, 즉흥곡은 금지, 독주는 5초 이하, 알레그로와 프레스토는 자제한다. 일장 연설을 마친 후 중위는 장고를 깔보는 듯 거만한 자세로 물어본다.
“네가 음악을 알기나 해?” 장고는 대답한다. “난 음악을 모르지만, 음악은 나를 압니다.”
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600만 명이 나치에 의해 죽어갔다. 집시들도 마찬가지다. 유랑민들이어서 얼마나 죽었는지도 모른다. 나치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유럽 여러 나라에선 집시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으며, 여전히 멸시의 삶들을 살아가고 있다.
집시들에게 ‘왜 그렇게 유랑생활을 하느냐?’ 물어 올 때 돌아오는 답은 다 똑같다. ‘머물 곳이 없어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 1945년 5월 해방된 파리에서 ‘집시 형제들을 위한 진혼곡’이 연주됐다. 작곡자는 장 라인하르트(1910-1953), 일명 ‘장고’였다. 공연 장소는 시각장애인아동협회 성당. 장고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희생당한 모든 집시들에게 이 곡을 헌정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 장중한 오케스트레이션과 합창으로 진혼곡이 연주되는 동안 올라오는 곡 설명이다.
출처,영화'장고 인 멜로디'
두통과 화상의 통증으로 고생하기도 하였는데 병원에 가기를 꺼려했던 그였기에 이를 치료하지 않고 방치하게 되는데 이것이 원인이 되어 그의 컨디션은 극도로 나빠지기 시작하고, 평범한 어느 토요일 저녁 파리에서의 연주 후 Avon railway station를 따라 귀가하던 중 심장마비로 쓰러지게 되다. 이에 근방의 병원으로 실려 가게 되지만 이때 이미 그는 사망한 상태였고 그의 나이 43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