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놈의 성질은.....



내 집 앞 화단에

몇 그루의 꽃나무가 있지

어떤 것이 잘난 놈인지

잘 모르겠더라고


어제는  말야

정말 이놈이 예뻤지.

내한테 온갖 카리스마 넘친다고 했거든

 

그런데 오늘은 저놈이 좋은 거야

저놈이 글쎄

나보고 젊다고 하지 않겠어

내 나이에 절반을 얘기하는 거야


반 세기를 살아도

이렇게 사탕발림에는 꼼짝을 못하거든 내가


그런데 말야

좋은거 보다는 미운거 먼저 생각했어


그렇게

말도

내 성격도

독사가 되었지

갈수록 독이 더 올랐어


미운거 먼저 보면

저들은 나를 볼 겨를이 없거든

바빴거든

그놈들 그 곳 열렸다 했거든 내가


늘 먼저 건드렸거든


난 성질이 왜 그리 급한지 모르겠어


내 집 앞 화단에

몇그루의 꽃나무가 있지


물을주고 햇빛주고

꽃을 피워봐야 알수 있잖아

그렇게

못써먹을 놈이란걸 알고 난 뒤

미워해도 괜찮은데 말야

 

 

                                               ------- 詩, 김 본 

 

 

나 목

 

늦가을

잎을 모두 떨궈 버린 감나무

가지 끝에 빨간 감 몇 개를 남겨놓았다.

가장 먼저 시선이 떠나지 않는 곳은

모든 잎사귀를 떨구어 버리고 서 부르르 떨고 있는 나목.

삶이 힘들게 다가올 때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잎사귀를 떨어내는 일임을...

앙상하게 드러난 가지를 직시하는 일임을...

거품을 걷어내고 화려한 의상을 벗었을 때

드러내는 내 몸의 구조를 똑바로 볼 수 있어야 함을...

나목처럼 

 

내 삶의 진실

내가 딛고 서있는 땅 아래를 처음 봤을 때

날아가 버릴 것 깉은

다시 일어서지 못한다는 말에

난 지쳐버렸다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

떨구어진 잎사귀가 뿌리의 거름이 되듯

다시 거름으로.....

마지막 과실마저 스쳐 지나가는 새들의 만찬으로 남겨두었던

너의 마음

다시 시작하기 위하여

지금의 만족을 포기하는 나는 너가 되고 싶다

 

 

詩, Kim Von

 

 

 

감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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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트 레즈너(Trent Reznor)!

원 맨 밴드 나인 인치 네일스(NIN)는 세기말 사운드라 불리는 인더스트리얼음악의 정수이다. 혼란과 무질서로 대변되는 어지러운 시대에 그가 퍼트린 소음의 미학은 일대 사운드의 반란이었다.

1990년대의 영미권 대중음악을 주도한 이들이 소통에 대한 욕망은 누구보다 강렬하지만 소통에 대해서는 냉소적이었던 잃어버린 세대였다면 그 중심에 나인 인치 네일스(Nine Inch Nails)가 있었다는 라고 말 할 것이다.

 

나인 인치 네일스

사진출처,락금블로그

 

나인 인치 네일스의 음악은 고통에 대한 감당이다. 그가 만들어낸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인더스트리얼 메틀의 파괴적 성향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향한다.

 

레즈너는 기존 록음악의 양식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예쁘장한 소리대신 귀에 거슬리는 노이즈를 의도적으로 채택하여 소음도 음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미지화 한다. 대중들도 열렬히 환영하며 기꺼이 그의 추종자가 되기를 자청했다. 그만큼 세기 끝물에 나인 인치 네일스의 인더스트리얼 전도는 엄청난 빛을 발했다.

사실상 가사라는 측면에서 나인 인치 네일스에게 기대할 수 있는 부분은 거의 없지만 레즈너는 자신의 사운드를 이미지로 바꾸는 데 놀라운 공간감각을 과시했고 내면의 충동에 따른 절규라는 록의 명제적 주제에 성공적으로 새로운 옷을 입혔다.


하지만 트렌트 레즈너가 인더스트리얼을 창조한 것은 아니다. 모든 음악 장르가 그렇듯 긴 세월동안 합종연횡을 거듭하면서 번듯하게 세기말의 축복을 받았다.

 


트렌트 레즈너가 인더스트리얼로 귀의(歸依)한 연유는 그의 성장과정에서 유추할 수 있다. 그는 1965년 미국 펜실베니아 주의 머서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부터 할머니의 품에서 자랐다. 할머니의 관심 속에 피아노와 색소폰, 튜바 등을 배우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클래식음악에 빠져있던 그가 이 음악으로 선회하게 된 계기는 대학에서 컴퓨터 엔지니어링을 전공하면서부터였다. 전자 음악의 아이콘인 컴퓨터를 다루면서 풍성하고 이질적인 효과음과 소리들에 심취하게 됐다.

졸업 후에는 클리브랜드로 이주, 스튜디오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며 노이즈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여러 밴드에서 활동하며 앨범을 발표하는 등 실전에도 전념했다. 그는 1988년 언더그라운드에서 갈고 닦은 이론과 실기를 바탕으로 데모 음반을 제작하고 자신의 페르소나(Persona) 나인 인치 네일스를 출범시켰다.

나인 인치 네일스의 음악은 다른 인디스트리얼 밴드에 비해 접근이 용이하다. 멜로디에 생동감이 넘치며, 사운드도 라이브무대에서 실제 연주가 가능하게끔 제작하기 때문에 전자음이면서 전자음이 아니다. 그 내면에 인간의 박동소리가 고동친다.

1997년 시사 주간지 타임이 그를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선정하면서 "트렌트 레즈너는 인더스트리얼 음악의 황제이다. 그는 암울한 인더스트리얼 음악에 인간성을 부여한 시인이다."라는 코멘트가 말해준다.


 

트렌트 레즈너의 후속작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자신을 돌봐왔던 할머니의 죽음과 절친했던 마를린 맨슨과의 결별 등 죽음과 믿음 상실이라는 고통 속에서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 그를 향한 언론과 팬들의 무조건적인 기대감 역시 좋은 음악을 만들어야 한다는 엄청난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그 사이에 영화 음악 감독을 맡기도 했다. 리듬을 자유자재로 교차시키며 음악의 거대한 산을 쌓아나간다. 레즈너 특유의 탐미주의도 여전했다. <롤링스톤>은 이 앨범을 소외와 공포의 출구인 핑크 플로이드의 <The Wall>의 트렌트 레즈너 버전이라며 극찬했다.
신성모독과 폭력과 성욕에 대한 기괴한 이미지가 끊임없이 나오지만 그 이미지들은 모두 보슈 (Hieronymus Bosch, 15세기  초현실주의라는 장르의 원조로 인정받고 있다.)가 그린 지옥도의 현대적 버전 같은 세트 안에서 유동한다.

그림,15C 네덜란드 화가,세속적인 기쁨의 정원


작용이 있는 곳에 반작용은 늘 있다. 트렌트 레즈너가 대중 음악계에 쌓아 올린 가장 큰 메리트는 인더스트리얼의 대중화다. 그러나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는 종종 원하던 것에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것이 살아남은 록 스타의 숙명일 것이다. 반대로 이것은 또한 상업성을 타도하자는 정신에서 출발한 인더스트리얼의 기조를 스스로 허무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또 다른 작용과 반작용을 만들어 내는 노력이다. 그것을 위해 지금도 나인 인치 네일스의 주인공 트렌트 레즈너는 세기의 시작도 그와 함께 갈 것이다.

 

 

 

 

 

 

 

 

 

 

내가 본
수많은 전쟁 영화중 단연 최고다.
죽음, 사랑, 비참함, 조국애,
인간성의 파괴와 사상의 바닥까지..
실화를 바탕으로 한
Sniper(저격수)들의 이야기!

 

애너미 엣 더 게이츠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다.
실타래처럼 얽혀 버린 암울한 삶들!
내가  공부하고 느끼고 알고 있는 한
'악마와 영웅은 동시에 태어난다

 

 

 

 

2차 세계대전 히틀러의 독일군이
1942년 러시아를 침공한다.
러시아의 전략적 요충지인 볼가강 하류의
산업도시 스탈린그라드!

사실 2차 세계대전은
미국,영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과
독일과의 전쟁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독일과 러시아 중심의 전쟁이다.
독일의 전력 80%가 러시아 전선에 배치되고
독일군 300만이 사망하였으며
러시아는 민간인 포함하여
2천만명 정도가 2차대전 중 죽었단다.(러시아의 사망자수는 아직도 비밀사항이다

,영 등 연합군의유럽전선 사망자수는 40만명, 당시 한반도 인구가 2천만명)



러시아가 
마지막 독일 진격시
30만명의 러시아군이 목숨을 바쳤지만
미국, 영국 연합군의(러시아의 비하면)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거의 무혈입성이나 다름없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있던 기가막힌 오해!
이는 미국 중심의 교육과
할리우드 영화가 낳은 왜곡이다.

 

스나이퍼 영화

 

 

 

 

 

이 영화는
앞에서는 독일군이 공격해오고
뒤에서는 러시아 장교들이 총을 쏘아대고
죽음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던
러시아 사병들!
180일간에 걸친 스탈린그라드 전투!

 

영화 전체에 깔리는 처참함과 인간애!
우연처럼 스쳐갈 것 같은 만남이
운명이 되고
그 어떤 영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속삭이듯 등장하는 베드Scene!
이것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가장 아름다운 베드신 영화

 

 


프랑스의 거장 장자크 아노 감독의
2001년 작품!(왜 이제야 알았지?)
이런 얘기 잘 안하지만
진실로 강추!!!!!

'목소리가 참 곱다'라는 생각을 멈추지 못하겠다. 이 천상의 목소리!

케이티 멜루아(Katie Meiua)는 구 소련연방 그루지아 공화국에서 1984년에 태어났다.

어릴 때 북아일랜드 이주한 후 14살 때 영국에 정착하여 2003년에 데뷔한 어쿠스틱, 블루스, 팝 재즈스타일을 구사한다.

보컬 실력은 물론이고, 기타, 피아노, 바이올린 등을 능숙하게 다루고 작곡 능력도 탁월하여 영국의 노라존스라는 별칭을 얻기도 한다.

 

케이트 말루아

사진출처,미니즘블로그

 

그녀는 가수가 되기 위해 영국예술학교에 입학하여 작곡공부를 시작했고, 이곳에서 그녀의 매니저이자 프로듀서인 Mike Batt를 만난다. 인생의 터닝 포인트라고 할까.

케이티 말루아는 당시 33살의 나이로 사망한 에바 캐시디를 위해 본인이 직접 만든 ‘Faraway Voice’란 곡을 부르기도 했다.

이 매니저의 주선으로 Dramatico 레이블과 계약한다.

2006년 영국 베스트셀링 음반판매 여성가수와 유럽최다 음반판매 가수가 된다.

20031119세의 나이로 첫 앨범을 냈으며 이는 영국앨범챠트 1위에 오르며 180만장을 팔았고 지금까지 4번에 플래티늄(Platinum)을 기록하고 있다.

고음과 지르는 스타일에 젖어 있는 우리들에게 가장 창아한 목소리로 영혼을 달래줄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뮤지션이다.

 

 

Katie Melua, I Will be There(오케스트라 라이브)

 

 

 

 

그의 연주를 들으면
 '이제 아무 것도 필요 없어'라는 기분이 든다
.
- 무라카미 하루키

 

이렇게 쓰인 정지화면으로부터 시작되는 장고 인 멜로디라는 영화를 봤다.

단 여덟 개의 손가락으로 자유를 연주한 재즈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타리스트 !
 '장고 라인하르트'에 대한 첫 기록 영화이다
  
장고 라인하르트는 벨기에 출생의 프랑스 재즈기타 연주자이다

집시 음악과 스윙 재즈를 융합시킨 집시 스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종종 "유럽 최초의 위대한 재즈 뮤지션"이라고 평가되며, 후세의 뮤지션에 큰 영향을 미치는 많은 걸작을 발표했다. 호텔 방에서 갑자기 사라져 집시의 야영지에서 묵는가 하면 몇 주일동안 번 돈을 하룻밤 도박으로 날려버리는 등 평생 집시 기질지닌 채 살아가며 연주했다.

벨기에 리벨시에서 태어난 장고는 12세 때 어머니에게서 선물 받은 벤조로 연주를 시작했고, 집시 무리를 떠나 파리의 음악인들과 교류하면서 음악의 폭을 넓혔다. 장고는 1928년 화재로 다리와 왼손에 심한 화상을 입게 된 후 왼손은 마비되고 두 개의 손가락을 잃었다. 이후 6개월에 걸친 혼신의 연습으로 재활훈련을 거쳐 핑거링을 할때 두 손가락을 질질 끌며 지판을 이동하는 특이한 연주기법으로 기타리스트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장고 라인하르트

사진출처,굿인터내셔날

 

 

장고는 193020살이 되던 해, 듀크 엘링턴, 조 베누티, 바이더백, 니콜스, 에디 랭, 루이 암스트롱 등의 연주에 감명을 받게 되면서 재즈 기타리스트의 길로 접어들었고, 1931년 프랑스 재즈계에 등장하여 1934 파리에서 S.그라펠리와 함께 '핫클럽 5중주단(Quintette du Hot Club de France)'을 조직하고 독특한 기교와 광시곡 스타일의 기타 솔로로 미국에까지 알려졌다. 1946년에 듀크 엘링턴의 초대로 미국순회공연을 통해 자신의 기타세계를 널리 알렸다.

 

장고 라인하르트의 후예들

사진출처,다큐,장고 라인하르트의 후예들

 

왼쪽 손가락이 두 개 밖에 움직이지 않는 어려움 속에 장고가 펼쳐내는 재즈와 집시 사운드의 융합은 한 번 들으면 그대로 기억에 박히는 힘이 있다. 세상을 떠난 지 60년이훌쩍 넘은 지금가지  계속되고 있다.

 

또한 장고 라인하르트의 삶을 영화(장고 인 멜로디, 2017)로도 만들어졌으며, 그를 추모하는 노래가 만들어 질 정도로 재즈계에 최고의 뮤지션으로 회자된다.

 

그리고 이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장고 라인하르트를 추종하는 후예들이 장고 탄생 100주년(2010)을 맞아 벌이는 기타 협연과 장고의 삶을 조명한 다큐멘타리 작품 장고 라인하르트의 후예들이라는 제목으로 제천 국제영화음악제에서도 선을 보였다. 한국의 한()을 담은 선율과도 비슷한 어느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운 독창적인 주법들이 절묘하게 소개된다.

장고 라인하르트의 손자를 포함한 100명의 후예들이 전 세계를 다니면서 연주를 한다.

 

기타 속주의 달인

출처,영화'장고 인 멜로디'

 

영화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장교 파티에 앞서 함머슈타인 중위가 지시를 하는 장면이다. 식사 중엔 피아노 연주만 한다, 화성 장음계는 좋지만 블루스는 안 됨, 당김 음은 5% 미만, 즉흥곡은 금지, 독주는 5초 이하, 알레그로와 프레스토는 자제한다. 일장 연설을 마친 후 중위는 장고를 깔보는 듯 거만한 자세로 물어본다.

 

네가 음악을 알기나 해?” 장고는 대답한다. “난 음악을 모르지만, 음악은 나를 압니다.”

 

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600만 명이 나치에 의해 죽어갔다. 집시들도 마찬가지다. 유랑민들이어서 얼마나 죽었는지도 모른다. 나치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유럽 여러 나라에선 집시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으며, 여전히 멸시의 삶들을 살아가고 있다.

집시들에게 왜 그렇게 유랑생활을 하느냐?’ 물어 올 때 돌아오는 답은 다 똑같다. ‘머물 곳이 없어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 19455월 해방된 파리에서 집시 형제들을 위한 진혼곡이 연주됐다. 작곡자는 장 라인하르트(1910-1953), 일명 장고였다. 공연 장소는 시각장애인아동협회 성당. 장고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희생당한 모든 집시들에게 이 곡을 헌정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 장중한 오케스트레이션과 합창으로 진혼곡이 연주되는 동안 올라오는 곡 설명이다

 

여덟 손가락의 기타리스트

출처,영화'장고 인 멜로디'

 

두통과 화상의 통증으로 고생하기도 하였는데 병원에 가기를 꺼려했던 그였기에 이를 치료하지 않고 방치하게 되는데 이것이 원인이 되어 그의 컨디션은 극도로 나빠지기 시작하고, 평범한 어느 토요일 저녁 파리에서의 연주 후 Avon railway station를 따라 귀가하던 중 심장마비로 쓰러지게 되다. 이에 근방의 병원으로 실려 가게 되지만 이때 이미 그는 사망한 상태였고 그의 나이 43세였다

 

 

 

 

 

헐리웃의 최고의 절친 케이트 패리와 테일러 스위프트는 세상이 다 아는 절친이었다.


 

스위프트와 페리는 할리우드의 최고 절친 이었다. 이들의 불화는 2014년 페리가 스위프트의 투어 중 댄서들을 자신의 투어에 단기고용하면서 시작됐다. 원래 페리의 댄서였던 이들은 페리가 투어를 쉬는 동안 스위프트의 댄서로 활동하다 다시 페리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테일러 스위프트는 케이티 페리가 자신의 투어를 망치려 했다고 생각하여 이에 크게 분노했다.  
케이티 페리의 2집 투어를 함께한 백댄서 중 3명이 이 모든 사건의 발단이다

 

계약 전 댄서들은 테일러에게 '케이티가 언제 컴백할지 모르니 단기 계약을 맺고 싶고

30일 유예를 두고 하차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미리 의향을 밝혔다.

그래서 계약서에 30일 유예 조항이 들어갔다.

 

 

  케이트 페리, 테일러 스위프트

사진출처,위키트리

 


투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케이티 페리의 컴백이 가시화되었다.
이때 댄서들은 테일러와 투어 기간 전체에 대한 (full tour) 계약을 맺지 않은 상태였고
케이티가 다시 프로모션 및 투어를 준비하면 당연히 본인들도 합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30일 전에 테일러에게 하차 의사를 전달하였다.(30일 안에 후임자를 구해 테일러 투어 진행에 지장이 없게 인수인계하겠다는 뜻)
이에 테일러는 가족 같이 생각했던 댄서들에게 배신 당한 기분으로 크게 분개해하면서 그들의 '하차' 요구를 받아들이는 대신 그 자리에서 바로 해고하였다.

 

 

 

"케이티랑은 2년 반이나 같이 일하던 가족 같은 사이였기 때문에 다시 투어를 시작할 때 당연히 같이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테일러 투어에서는 춤을 거의 추지 않기 때문에 케이티 공연에 참여하고 싶었다." 댄서들이 말했다.
(케이티 페리가 2017522일 카풀 가라오케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댄서들이 해고된 직후 오해를 풀기 위해 테일러에게 먼저 연락했으나 테일러가 자신을 완전히 차단하였다고 함_)

 

스위프트는 지난 2014년 신곡 '배드 블러드(Bad Blood)'를 소개하며 "친구인지 적인지 혼란스러웠지만, 그녀의 악행으로 적이라는 것을 깨달은 어떤 여가수에 대한 노래"라고 밝히며 관계가 악화됐다. 그 뒤로 두 사람은 가수답게 서로를 향한 날선 디스를 담은 곡을 발표하며 싸움을 지속해 왔었다. 드디어 20185, 스위프트가 공개적으로 페리의 편지에 '고맙다'는 의견을 내비치며 '팝 공주'들이 4년간의 앙숙 관계를 끝낸 것으로 보인다.(스포츠조선일부참조)

위 내용도 있지만 '존 메이어'때문에 불화가 더 악화되었다는 설도 있다.

 

 

사진출저,더스토리오브팝블로그

 

 

할리우드 최고의 가수인 케이티 페리와 테일러 스위프트가 마침내 화해했단다.  

스위프트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공개한 페리의 편지에는 "오랜 친구야 안녕. 그동안 나는 우리 사이에 있었던 과거의 오해와 상처받은 마음에 대해 성찰해 봤어..."라는 내용을 포함해 "매우 미안해"라 적혀있다. 페리가 스위프트에 화해의 손길을 뻗은 것. 스위프트는 인스타그램에 '고마워 케이티'라는 문구와 함께 하트 이모티콘을 첨부하며 화해 신청을 받아들였다.  

'갈등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러나 감정적인 싸움으로의 전개는 가슴 속 생채기만 남아 스스로를 힘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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