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트 레즈너(Trent Reznor)!

원 맨 밴드 나인 인치 네일스(NIN)는 세기말 사운드라 불리는 인더스트리얼음악의 정수이다. 혼란과 무질서로 대변되는 어지러운 시대에 그가 퍼트린 소음의 미학은 일대 사운드의 반란이었다.

1990년대의 영미권 대중음악을 주도한 이들이 소통에 대한 욕망은 누구보다 강렬하지만 소통에 대해서는 냉소적이었던 잃어버린 세대였다면 그 중심에 나인 인치 네일스(Nine Inch Nails)가 있었다는 라고 말 할 것이다.

 

나인 인치 네일스

사진출처,락금블로그

 

나인 인치 네일스의 음악은 고통에 대한 감당이다. 그가 만들어낸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인더스트리얼 메틀의 파괴적 성향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향한다.

 

레즈너는 기존 록음악의 양식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예쁘장한 소리대신 귀에 거슬리는 노이즈를 의도적으로 채택하여 소음도 음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미지화 한다. 대중들도 열렬히 환영하며 기꺼이 그의 추종자가 되기를 자청했다. 그만큼 세기 끝물에 나인 인치 네일스의 인더스트리얼 전도는 엄청난 빛을 발했다.

사실상 가사라는 측면에서 나인 인치 네일스에게 기대할 수 있는 부분은 거의 없지만 레즈너는 자신의 사운드를 이미지로 바꾸는 데 놀라운 공간감각을 과시했고 내면의 충동에 따른 절규라는 록의 명제적 주제에 성공적으로 새로운 옷을 입혔다.


하지만 트렌트 레즈너가 인더스트리얼을 창조한 것은 아니다. 모든 음악 장르가 그렇듯 긴 세월동안 합종연횡을 거듭하면서 번듯하게 세기말의 축복을 받았다.

 


트렌트 레즈너가 인더스트리얼로 귀의(歸依)한 연유는 그의 성장과정에서 유추할 수 있다. 그는 1965년 미국 펜실베니아 주의 머서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부터 할머니의 품에서 자랐다. 할머니의 관심 속에 피아노와 색소폰, 튜바 등을 배우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클래식음악에 빠져있던 그가 이 음악으로 선회하게 된 계기는 대학에서 컴퓨터 엔지니어링을 전공하면서부터였다. 전자 음악의 아이콘인 컴퓨터를 다루면서 풍성하고 이질적인 효과음과 소리들에 심취하게 됐다.

졸업 후에는 클리브랜드로 이주, 스튜디오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며 노이즈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여러 밴드에서 활동하며 앨범을 발표하는 등 실전에도 전념했다. 그는 1988년 언더그라운드에서 갈고 닦은 이론과 실기를 바탕으로 데모 음반을 제작하고 자신의 페르소나(Persona) 나인 인치 네일스를 출범시켰다.

나인 인치 네일스의 음악은 다른 인디스트리얼 밴드에 비해 접근이 용이하다. 멜로디에 생동감이 넘치며, 사운드도 라이브무대에서 실제 연주가 가능하게끔 제작하기 때문에 전자음이면서 전자음이 아니다. 그 내면에 인간의 박동소리가 고동친다.

1997년 시사 주간지 타임이 그를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선정하면서 "트렌트 레즈너는 인더스트리얼 음악의 황제이다. 그는 암울한 인더스트리얼 음악에 인간성을 부여한 시인이다."라는 코멘트가 말해준다.


 

트렌트 레즈너의 후속작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자신을 돌봐왔던 할머니의 죽음과 절친했던 마를린 맨슨과의 결별 등 죽음과 믿음 상실이라는 고통 속에서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 그를 향한 언론과 팬들의 무조건적인 기대감 역시 좋은 음악을 만들어야 한다는 엄청난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그 사이에 영화 음악 감독을 맡기도 했다. 리듬을 자유자재로 교차시키며 음악의 거대한 산을 쌓아나간다. 레즈너 특유의 탐미주의도 여전했다. <롤링스톤>은 이 앨범을 소외와 공포의 출구인 핑크 플로이드의 <The Wall>의 트렌트 레즈너 버전이라며 극찬했다.
신성모독과 폭력과 성욕에 대한 기괴한 이미지가 끊임없이 나오지만 그 이미지들은 모두 보슈 (Hieronymus Bosch, 15세기  초현실주의라는 장르의 원조로 인정받고 있다.)가 그린 지옥도의 현대적 버전 같은 세트 안에서 유동한다.

그림,15C 네덜란드 화가,세속적인 기쁨의 정원


작용이 있는 곳에 반작용은 늘 있다. 트렌트 레즈너가 대중 음악계에 쌓아 올린 가장 큰 메리트는 인더스트리얼의 대중화다. 그러나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는 종종 원하던 것에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것이 살아남은 록 스타의 숙명일 것이다. 반대로 이것은 또한 상업성을 타도하자는 정신에서 출발한 인더스트리얼의 기조를 스스로 허무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또 다른 작용과 반작용을 만들어 내는 노력이다. 그것을 위해 지금도 나인 인치 네일스의 주인공 트렌트 레즈너는 세기의 시작도 그와 함께 갈 것이다.

 

 

 

 

 

 

 

 

 

'목소리가 참 곱다'라는 생각을 멈추지 못하겠다. 이 천상의 목소리!

케이티 멜루아(Katie Meiua)는 구 소련연방 그루지아 공화국에서 1984년에 태어났다.

어릴 때 북아일랜드 이주한 후 14살 때 영국에 정착하여 2003년에 데뷔한 어쿠스틱, 블루스, 팝 재즈스타일을 구사한다.

보컬 실력은 물론이고, 기타, 피아노, 바이올린 등을 능숙하게 다루고 작곡 능력도 탁월하여 영국의 노라존스라는 별칭을 얻기도 한다.

 

케이트 말루아

사진출처,미니즘블로그

 

그녀는 가수가 되기 위해 영국예술학교에 입학하여 작곡공부를 시작했고, 이곳에서 그녀의 매니저이자 프로듀서인 Mike Batt를 만난다. 인생의 터닝 포인트라고 할까.

케이티 말루아는 당시 33살의 나이로 사망한 에바 캐시디를 위해 본인이 직접 만든 ‘Faraway Voice’란 곡을 부르기도 했다.

이 매니저의 주선으로 Dramatico 레이블과 계약한다.

2006년 영국 베스트셀링 음반판매 여성가수와 유럽최다 음반판매 가수가 된다.

20031119세의 나이로 첫 앨범을 냈으며 이는 영국앨범챠트 1위에 오르며 180만장을 팔았고 지금까지 4번에 플래티늄(Platinum)을 기록하고 있다.

고음과 지르는 스타일에 젖어 있는 우리들에게 가장 창아한 목소리로 영혼을 달래줄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뮤지션이다.

 

 

Katie Melua, I Will be There(오케스트라 라이브)

 

 

 

 

그의 연주를 들으면
 '이제 아무 것도 필요 없어'라는 기분이 든다
.
- 무라카미 하루키

 

이렇게 쓰인 정지화면으로부터 시작되는 장고 인 멜로디라는 영화를 봤다.

단 여덟 개의 손가락으로 자유를 연주한 재즈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타리스트 !
 '장고 라인하르트'에 대한 첫 기록 영화이다
  
장고 라인하르트는 벨기에 출생의 프랑스 재즈기타 연주자이다

집시 음악과 스윙 재즈를 융합시킨 집시 스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종종 "유럽 최초의 위대한 재즈 뮤지션"이라고 평가되며, 후세의 뮤지션에 큰 영향을 미치는 많은 걸작을 발표했다. 호텔 방에서 갑자기 사라져 집시의 야영지에서 묵는가 하면 몇 주일동안 번 돈을 하룻밤 도박으로 날려버리는 등 평생 집시 기질지닌 채 살아가며 연주했다.

벨기에 리벨시에서 태어난 장고는 12세 때 어머니에게서 선물 받은 벤조로 연주를 시작했고, 집시 무리를 떠나 파리의 음악인들과 교류하면서 음악의 폭을 넓혔다. 장고는 1928년 화재로 다리와 왼손에 심한 화상을 입게 된 후 왼손은 마비되고 두 개의 손가락을 잃었다. 이후 6개월에 걸친 혼신의 연습으로 재활훈련을 거쳐 핑거링을 할때 두 손가락을 질질 끌며 지판을 이동하는 특이한 연주기법으로 기타리스트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장고 라인하르트

사진출처,굿인터내셔날

 

 

장고는 193020살이 되던 해, 듀크 엘링턴, 조 베누티, 바이더백, 니콜스, 에디 랭, 루이 암스트롱 등의 연주에 감명을 받게 되면서 재즈 기타리스트의 길로 접어들었고, 1931년 프랑스 재즈계에 등장하여 1934 파리에서 S.그라펠리와 함께 '핫클럽 5중주단(Quintette du Hot Club de France)'을 조직하고 독특한 기교와 광시곡 스타일의 기타 솔로로 미국에까지 알려졌다. 1946년에 듀크 엘링턴의 초대로 미국순회공연을 통해 자신의 기타세계를 널리 알렸다.

 

장고 라인하르트의 후예들

사진출처,다큐,장고 라인하르트의 후예들

 

왼쪽 손가락이 두 개 밖에 움직이지 않는 어려움 속에 장고가 펼쳐내는 재즈와 집시 사운드의 융합은 한 번 들으면 그대로 기억에 박히는 힘이 있다. 세상을 떠난 지 60년이훌쩍 넘은 지금가지  계속되고 있다.

 

또한 장고 라인하르트의 삶을 영화(장고 인 멜로디, 2017)로도 만들어졌으며, 그를 추모하는 노래가 만들어 질 정도로 재즈계에 최고의 뮤지션으로 회자된다.

 

그리고 이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장고 라인하르트를 추종하는 후예들이 장고 탄생 100주년(2010)을 맞아 벌이는 기타 협연과 장고의 삶을 조명한 다큐멘타리 작품 장고 라인하르트의 후예들이라는 제목으로 제천 국제영화음악제에서도 선을 보였다. 한국의 한()을 담은 선율과도 비슷한 어느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운 독창적인 주법들이 절묘하게 소개된다.

장고 라인하르트의 손자를 포함한 100명의 후예들이 전 세계를 다니면서 연주를 한다.

 

기타 속주의 달인

출처,영화'장고 인 멜로디'

 

영화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장교 파티에 앞서 함머슈타인 중위가 지시를 하는 장면이다. 식사 중엔 피아노 연주만 한다, 화성 장음계는 좋지만 블루스는 안 됨, 당김 음은 5% 미만, 즉흥곡은 금지, 독주는 5초 이하, 알레그로와 프레스토는 자제한다. 일장 연설을 마친 후 중위는 장고를 깔보는 듯 거만한 자세로 물어본다.

 

네가 음악을 알기나 해?” 장고는 대답한다. “난 음악을 모르지만, 음악은 나를 압니다.”

 

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600만 명이 나치에 의해 죽어갔다. 집시들도 마찬가지다. 유랑민들이어서 얼마나 죽었는지도 모른다. 나치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유럽 여러 나라에선 집시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으며, 여전히 멸시의 삶들을 살아가고 있다.

집시들에게 왜 그렇게 유랑생활을 하느냐?’ 물어 올 때 돌아오는 답은 다 똑같다. ‘머물 곳이 없어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 19455월 해방된 파리에서 집시 형제들을 위한 진혼곡이 연주됐다. 작곡자는 장 라인하르트(1910-1953), 일명 장고였다. 공연 장소는 시각장애인아동협회 성당. 장고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희생당한 모든 집시들에게 이 곡을 헌정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 장중한 오케스트레이션과 합창으로 진혼곡이 연주되는 동안 올라오는 곡 설명이다

 

여덟 손가락의 기타리스트

출처,영화'장고 인 멜로디'

 

두통과 화상의 통증으로 고생하기도 하였는데 병원에 가기를 꺼려했던 그였기에 이를 치료하지 않고 방치하게 되는데 이것이 원인이 되어 그의 컨디션은 극도로 나빠지기 시작하고, 평범한 어느 토요일 저녁 파리에서의 연주 후 Avon railway station를 따라 귀가하던 중 심장마비로 쓰러지게 되다. 이에 근방의 병원으로 실려 가게 되지만 이때 이미 그는 사망한 상태였고 그의 나이 43세였다

 

 

 

 

 

헐리웃의 최고의 절친 케이트 패리와 테일러 스위프트는 세상이 다 아는 절친이었다.


 

스위프트와 페리는 할리우드의 최고 절친 이었다. 이들의 불화는 2014년 페리가 스위프트의 투어 중 댄서들을 자신의 투어에 단기고용하면서 시작됐다. 원래 페리의 댄서였던 이들은 페리가 투어를 쉬는 동안 스위프트의 댄서로 활동하다 다시 페리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테일러 스위프트는 케이티 페리가 자신의 투어를 망치려 했다고 생각하여 이에 크게 분노했다.  
케이티 페리의 2집 투어를 함께한 백댄서 중 3명이 이 모든 사건의 발단이다

 

계약 전 댄서들은 테일러에게 '케이티가 언제 컴백할지 모르니 단기 계약을 맺고 싶고

30일 유예를 두고 하차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미리 의향을 밝혔다.

그래서 계약서에 30일 유예 조항이 들어갔다.

 

 

  케이트 페리, 테일러 스위프트

사진출처,위키트리

 


투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케이티 페리의 컴백이 가시화되었다.
이때 댄서들은 테일러와 투어 기간 전체에 대한 (full tour) 계약을 맺지 않은 상태였고
케이티가 다시 프로모션 및 투어를 준비하면 당연히 본인들도 합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30일 전에 테일러에게 하차 의사를 전달하였다.(30일 안에 후임자를 구해 테일러 투어 진행에 지장이 없게 인수인계하겠다는 뜻)
이에 테일러는 가족 같이 생각했던 댄서들에게 배신 당한 기분으로 크게 분개해하면서 그들의 '하차' 요구를 받아들이는 대신 그 자리에서 바로 해고하였다.

 

 

 

"케이티랑은 2년 반이나 같이 일하던 가족 같은 사이였기 때문에 다시 투어를 시작할 때 당연히 같이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테일러 투어에서는 춤을 거의 추지 않기 때문에 케이티 공연에 참여하고 싶었다." 댄서들이 말했다.
(케이티 페리가 2017522일 카풀 가라오케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댄서들이 해고된 직후 오해를 풀기 위해 테일러에게 먼저 연락했으나 테일러가 자신을 완전히 차단하였다고 함_)

 

스위프트는 지난 2014년 신곡 '배드 블러드(Bad Blood)'를 소개하며 "친구인지 적인지 혼란스러웠지만, 그녀의 악행으로 적이라는 것을 깨달은 어떤 여가수에 대한 노래"라고 밝히며 관계가 악화됐다. 그 뒤로 두 사람은 가수답게 서로를 향한 날선 디스를 담은 곡을 발표하며 싸움을 지속해 왔었다. 드디어 20185, 스위프트가 공개적으로 페리의 편지에 '고맙다'는 의견을 내비치며 '팝 공주'들이 4년간의 앙숙 관계를 끝낸 것으로 보인다.(스포츠조선일부참조)

위 내용도 있지만 '존 메이어'때문에 불화가 더 악화되었다는 설도 있다.

 

 

사진출저,더스토리오브팝블로그

 

 

할리우드 최고의 가수인 케이티 페리와 테일러 스위프트가 마침내 화해했단다.  

스위프트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공개한 페리의 편지에는 "오랜 친구야 안녕. 그동안 나는 우리 사이에 있었던 과거의 오해와 상처받은 마음에 대해 성찰해 봤어..."라는 내용을 포함해 "매우 미안해"라 적혀있다. 페리가 스위프트에 화해의 손길을 뻗은 것. 스위프트는 인스타그램에 '고마워 케이티'라는 문구와 함께 하트 이모티콘을 첨부하며 화해 신청을 받아들였다.  

'갈등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러나 감정적인 싸움으로의 전개는 가슴 속 생채기만 남아 스스로를 힘들게 한다'

 

 

 

나는 인디언플룻과 칼림바를 연주하는 사람입니다.

온 세상의 숨결과 보드라운 손길로부터 음악은 시작됩니다.

나는 마음에 담긴 그림들을 꺼내고, 보여주려는 사람입니다.

그림 속에는 따뜻함과 애틋함이 담겨 있습니다.

이 순간,

나의 음악은 당신의 그림이며, 나의 그림은 당신의 음악입니다.

나의 마음은 당신의 눈동자 속에서 떨려 나옵니다.

평화로움을 간절히 염원하는, 봄눈이 흩날리는 밤의 홀로 빛나는 별입니다.‘

(봄눈별의 Homepage중에서)

 

봄눈별

사진출처,프레시안

 

내가 경험한 아픔들 중에는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을 것 같은 아픔과
당장 내일을 긍정할 수 없는 아픔과
오늘 하루만 견디자는 정도의 아픔 등
여러 갈래의 많은 아픔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힘든 아픔은
마음 한구석이 언제나 시큰거리는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는
그런 아픔이라고 생각한다.
그 아픔은 진심으로 웃는 것도
사람과 사랑과 우정을 믿는 것도
내가 이미 충분한 존재라는 것까지도
언제까지나 부정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중략)

내일은 나아질 거라는 생각 대신
오늘의 내가 감사하다는 생각과
지난날의 나에게 수고했다는 말이면
내일은 나아질 것으로 기대하는 대신
내일을 살아갈 이유를 사랑하게 된다.
나아지지 않더라도 살아갈 용기가 난다.

 

나는 점점 검소해지고 있음을 느끼는데 그 이유는
이 모두 많은 돈과 정신적 에너지를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삶의 잔 근육들이 생겨나고 있다.
그리고…….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은
느리고 꾸준하게 하는 것이다.

(봄눈별의 글 중에서)

 

내가 봄눈별이란 뮤지션을 처음 만난 건 5년 전쯤으로 생각한다. 어느 치유음악회에서 본 봄눈별은 무슨 도사 같았으며, 인디언 플롯과 칼림바를 연주하는 그 모습은 그냥 있는 그대로의 감정이었고, 음악이었다. 그 뒤로 두세 번을 더 만나면서 간단히 인사하는 사이가 되었을 때는 아주 소탈한, 아주 솔직한, 그냥 음악할 때나 일상이거나 구분이 잘 되지 않는 모습에 또 한 번 놀랐다. 마음속에 상처딱지처럼 굳어버린 스스로의 아픔을 인정하고 진지하지만 처연하게 연주하는 봄눈별이다. 치유하기 위한 음악을 전하는 것과 함께 봄눈별 스스로가 치유하는 삶의 과정임을 절절하게 느낀다.

굳이 치유라는 단어를 꺼내지도 않았다. 그의 음악을 듣는 이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런 감정을 깊숙한 곳에서부터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치유음악,인디언플롯,진주에서

 

 

 

 

요즘 카펜터즈(Capenters)의 노래, '클로즈 투 유(Close to You)'가 정처 없이 떠오른다. 오랜 세월 사랑받고 있는 팝의 주옥같은 고전이다. 이 노래의 멜로디는 너무나 청아하다. 사실 '클로즈 투 유'는 카펜터즈의 노래가 아니라 턱 앤 패티(Tuck &Patti)의 음악이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팝의 리메이크를 하나 꼽으라면 턱 앤 패티의 이 노래를 꼽고 싶다. 물론 제프 버클리(Jeff Buckly)할렐루야도 만만치 않지만 말이다.

또한 턱 안드레스의 유로파 솔로 곡은 정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산타나(Santana)의 유로파(Europa)가 무색할 정도의 편곡과 즉흥연주로 영원히 끝나지 않을 유로파였다.

 

턱 앤 페티

사진출러,쿨님브로그

 

 

턱 앤 패티는 기타를 연주하는 턱 안드레스(Tuck Andress)과 노래를 하는 패티 캐치카트(Patti Cathcart)로 이루어진 듀오이다. 1988년 앨범 '티어스 오브 조이'로 데뷔하면서 이들의 음악은 당시 국내에서는 재즈로 분류되었다. 그리고 서양에서는 컨템포러리 재즈라는 장르로 이들의 음악을 이야기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들의 음악을 규정할 수 있는 장르가 당시에는 딱히 없었기 때문에 재즈라는 카테고리(Category)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당시에는 무엇인가 장르적으로 규정지을 수 없고 어쿠스틱 연주 기반의 음악이면 일단 재즈라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있어서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마 이들의 음악이 지금 시점에 나왔다면 팝의 카테고리 안에 들어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만큼 이들의 음악은 당시에 장르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무척 신선했으며, 충격이었다.

턱과 패티는 오디션 장에서 만나 서로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였다. 거기에 나는 음악적 가치들도 함께 하지 않았나 싶다.


이들의 이런 음악적 성격과 매력이 잘 드러난 앨범이 1989년 발매한 '러브 워리어스(Love Warriors)'이다. 턱의 기타 반주와 패티의 노래, 단 두 가지의 소리로만 채워진 앨범이다. 앨범의 노래 제목들을 살펴보면 존 레넌과 폴 매카트니의 'Honey Pie'와 브라질 음악가 도리 케이미의 'Cantador'뿐만 아니라 지미 핸드릭스의 음악까지 그 장르 범위가 무척 광범위하다.

신디로퍼’ Time After Time’은 입이 다 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음반을 재생하면서, 전혀 예상치 못한 스타일과 편곡으로 마지막 곡까지 너무나 편안하게 흘러가는 이들의 음악적 마력에 푹 빠지게 된다. 특히 저에게는 음악가의 개성과 독창성에 대해 깊이 있는 고민을 하게하고 본인 작곡만을 가장 최고라고 생각하던 철없던 시절이어서 턱 앤 패티는 나에게 있어 음악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 어떤 음악이라 하더라도 턱 앤 패티가 들려준다면 조용하지만, 깊이 있는 장르에 대한 관찰력과 애정으로 하여 마냥 푹 빠져 버릴 것만 같다. 점점 더 깊어가는 Tuck & Patti의 음악이 나에게는 영원할 것이라 생각한다.

 

 

Tuck & Patti 'Time After Time'

 

 

 

Tuck Andress 'Eroupa'

 

피에르 벤수잔(Pierre Bensusan)이라는 기타리스트를 안 것은 우연히 인터넷 검색을 하다 우울한 마음을 달래보려고 음악을 듣는다. 음악을 듣는 데 어디에 묶여 헤어 나올 수 없는 아주 묘한 감정 속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그렇게 처음 피에르 벤수잔을 만났다.

뉴에이지 기타리스트 중에 마이클 헤지스와 양대 산맥을 이룰 정도로 큰 영향을 미쳤고, 마이클 헤지스와는 음악으로 만난 절친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음악이 있다. 장르로 보면 포크, 재즈, 클래식, 팝으로 다양하다. 팝만 해도 컨트리, 올드 팝, 뉴 에이지, , 사이키델릭, 메탈까지 복잡할 정도이고 이 단어들을 모르면 음악을 모른다고 놀림까지 받을 만큼 다양함의 숫자가 너무 방대해졌다. 또한 같은 계열이라 하더라도 아프리카, 중동, 극동, 인도, 남아메리카까지 정말 많은 지역적 특색을 지니는 것, 그 만큼 다양한 음악이 있다심지어는 세계 인구 70억 명인데 70억 개의 장르(?)가 존재한다는 말이 들려올 정도로 많다.

이렇게 다양하게 장르별 지역별 음악이 있음에도 가끔은 어느 장르나 지역에 넣어야 할지 고민되는 음악을 만나기도 한다. 바로 피에르 벤수잔이 그렇다. 우연히 그의 음악을 듣고 바로 매료되어 버렸다

 

 

사진출처,견공님블로그

 

피에르 벤수잔은 알제리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핑거스타일)기타리스트이다. 그의 음악을 듣다 보면 신세계에 와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며, 내면의 혼란을 느끼는 지경에 다다른다. 뉴에이지라는 항목으로 적용을 해보지만 사실 어느 장르에 넣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도대체 어떤 음악에 가까울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벤수잔이 어느 인터뷰 내용에서 그에 대한 해답을 내 놓는다

"나의 음악은 포크가 아니고 재즈도 아니고 팝도 아니다. 그리고 클래식 또한 아니다. 그것은 나의 것 그 자체다

기타를 연주할 때는 기타를 치고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너는 그저 소리를 만들어내고 있을 뿐. 눈을 감고 소리와 공간만을 생각하라“고 한다.

 

현존하는 최고의 기타리스트란 말처럼 원곡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즉흥적인 변주를 많이하는 피에르 벤수잔. 그의 음악이 소름 기칠 정도로 무서운 건 듣는 사람의 감정을 꿰뚫고 조종하는 듯이 자유롭게 휘몰아치는 전개를 보여준다.

 

마이클 헤지스라는 절친이 교통사고를 당해 저 하늘로 간 뒤 큰 시름 속에 시달리다 마이클을 추억하는 곡을 만들어 하늘나라로 보낸다. 그 곡이 ‘So long Michael’란 연주곡이다.

 

 

 

So long Michael

 

 

 

 

 Iz1959년에 호눌룰루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1997년 저 무지개 너머로 떠나갔다. 이즈라엘 카마카미올레 (Israel Kamakawiwo'ole)라는 이름일 부르지 않고 Iz라고 부른다.

하와이의 전설적인 가수이자 독립운동가. 하와이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브라다 이즈(Bruddah Iz)라고 불렀으며, 지금도 Iz는 고유명사화 되어있다. 340kg이 넘는 거구였지만 우쿨렐레를 잘 다루었다. 우쿨렐레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결국 과체중에 의한 호흡곤란으로 1997년에 죽었다. 하와이의 독립을 위해 힘썼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에서 이 사람의 노래를 영화 BGM에 많이 삽입했다.
1997년 그가 죽었을 때, 하와이 주에서는 조기(현충일에 게양하는 그 조기)를 게양했으며, 1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모여 하와이 전통방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추모할 정도였다. 이것은 하와이 주정부가 민간인을 위해 최초로 조기한 사례다. 버락 오바마 이전에 하와이를 대표하는 인물은 이즈라엘이었다.

나는 이 노래에 깊은 사연이 깃들어 있다. 뭐라고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그래서인지 순수한 우울이 더 다가온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모아나의 주인공 마우이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기도하다.

하와이의 신화에 관한 노래를 영어로 만들어 미국 내에 발매하였으며, 하와이의 정신이 담긴 하와이안 장르를 알리는데 노력하였다. 하지만 그의 대표곡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법한 'Somewhere Over The Rainbow', 'What a Wonderful World'. 영상 마지막에 사람들이 바다에서 축제 같은 걸 벌이며 환호하는 영상이 나오는데, 이게 하와이 전통방식으로 진행한 그의 장례식이다. 바다에 뭔가를 뿌리는 걸 볼 수 있는데 그게 화장된 이즈의 유골...

 

오버 더 레인보우(Over the Rainbow)’1939년에 나온 영화 <오즈의 마법사(The Wizard of Oz)에서 주인공 도로시역을 맡은 주디 갈란드(Judy Garland)가 부른 노래다. ‘Somewhere Over the Rainbow(무지개 너머 어딘가)’라고도 불린다.

수많은 가수에 의해 리바이벌 된 발라드곡이지만, 이 곡은 <오즈의 마법사>에서 사라질 뻔했다고 한다. 시사회를 마친 MGM 간부들이 이 노래가 영화 전체의 흐름을 늘어지게 한다며 삭제할 것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감독의 고집으로 간신히 살아남았고, 이 곡은 아카데미 영화주제가상을 수상했다.

 

가사에는 순수한 낙관주의와 바닥에 묘하게 깔린 우울함이 섞여 있다. 하와이 출신의 가수 이즈(Iz)가 우클렐레에 맞춰 불렀던 노래도 크게 화제가 됐었다.

 

over the rainbow

 

Somewhere over the rainbow, way up high,
무지개 너머 어딘가, 저 높은 곳에
There's a land that I heard of once in a lullaby.
자장가에서 들었던 나라가 있다네.

 

Somewhere over the rainbow, skies are blue,
무지개 너머 어딘가, 하늘은 푸르고
And the dreams that you dare to dream really do come true.
네가 감히 꿈꿨던 일들이 정말 실현된다네.

 

Someday I'll wish upon a star
어느 날 나는 별에게 소원을 빌 거야.
And wake up where the clouds are far behind me.
그리고 구름이 내 뒤로 가버린 그곳에서 잠을 깰 거야.

 

Where troubles melt like lemon drops
걱정이 마치 레몬 사탕처럼 녹아 없어진 곳
Away above the chimney tops
굴뚝 꼭대기 위 저기
That's where you'll find me.
그곳에서 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거야.

 

Somewhere over the rainbow, blue birds fly,
무지개 너머 어딘가, 파랑새가 날고,
Birds fly over the rainbow,
새들은 무지개 너머로 날아가네
Why then, oh why can’t I?
그렇다면 왜, 왜 나라고 못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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